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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일보) 설립자 서봉 이동녕선생 특집 기사

대구일보 기사 재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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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삶 그의 꿈]

가난한 농가 출신 성실함으로 채운 삶…‘기업가·정치인·육영사업가’로 우뚝

<62> 기업가로 교육입국 꿈꾼 이동녕

2018.10.15

이동녕이 설립한 문경여고 모습.
이동녕이 설립한 문경여고 모습.


1983년 경주 도투락월드 목장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이동녕.
1983년 경주 도투락월드 목장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이동녕.

이동녕은 문경의 산골 오지 농촌에서 태어나 기업가, 정치인, 육영사업가로 우뚝한 위업을 남겼다.<br>
이동녕은 문경의 산골 오지 농촌에서 태어나 기업가, 정치인, 육영사업가로 우뚝한 위업을 남겼다.

서봉(瑞峰) 이동녕(李東寧ㆍ1905~1992)은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될 무렵 경북의 산골 오지 주흘산 아래 문경읍 팔영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기업가, 정치인, 육영사업가로 우뚝한 위업을 남긴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보통학교(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해방 직후 봉명광업을 일으켜 무연탄, 시멘트, 축산, 기계 등 많은 기업군을 이끌었고 제4, 6, 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영남대학교를 창건하고 성균관대학교를 경영했다.
그는 기업과 정치, 교육에 성공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꿈은 자신의 성실성과 가정의 화목, 고향의 발전과 나라의 번영을 위해 소박한 선비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이 80이 되었을 때 ‘나의 인생여록’이란 글을 통해 자신의 살아온 길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것뿐이다.
고서의 가르침대로 ‘경승태자길, 태승경자멸(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공경함이 게으름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게으름이 공경함을 이기는 자는 죽는다)’는 말을 교훈 삼아 내가 맡은 일과 추진한 사업에 오로지 성실로 임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남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항상 일을 찾아 묵묵히 동분서주해온 셈이다.
8ㆍ15광복 직후 실업계에 발을 내딛고 30여 년 분투노력한 결과 하늘의 도움으로 이제는 어느 정도 기업다운 기업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해 기업인이라는 직함도 얻게 됐다.
그러나 나로서는 결코 남들처럼 성공한 기업인이나 정치인으로 자부하기보다도 그동안 나의 향리에 문경학원을 설립해 육영에 전념하면서 영남학원 이사장직을 맡았던 일과 현재 맡고 있는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직책을 나의 최상의 보람으로 알고 있다.
물론 오늘의 산업사회 속에서 특히 공업화돼가는 과정 중에는 기업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육영사업이야말로 어느 분야보다도 가치 있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는 한평생 기업을 육성해서 얻은 이윤을 모두 교육에 투자하는 일을 더 없는 보람으로 여긴다.


◆청년기와 공직생활 
문경새재 조곡관을 중수하기 위해 현장을 살피는 이동녕.
문경새재 조곡관을 중수하기 위해 현장을 살피는 이동녕.
그는 아버지 이병주옹과 어머니 부림 홍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지방 유림인 할아버지 태구옹과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비롯 동몽선습, 소학, 대학 등 한학을 익히는 서당공부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 다음해 문경에 서양식 학교인 4년제 문경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일제학교를 싫어했던 아버지의 반대를 할아버지가 설득해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서양학문을 익혀야 일본을 앞설 수 있고 침략자 일본에 원수도 갚을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는 어린 나이에 남다른 향학열로 학교에 다녔다.
집과 학교간의 거리는 시오리 길이었고 짚신이 모자라 맨발로 다닐 때가 많았고 비 오는 날 냇물을 건너다 익사 위험에 놓였을 때도 있었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단념한 채 부모님의 주선으로 인근 가은면에 있는 울산 오씨와 혼인을 맺었다.
신랑은 13세, 신부는 16세였다.
결혼 후 처가의 권유로 가은에서 다시 유가 경전공부를 4년간 하다가 18세 되던 해 인척의 도움으로 문경군청 고원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그렇게 일제하에서 시작한 관리생활은 18년 동안 계속됐고 그 사이 문경군청 회계과에 근무하다가 경북도청 회계과로 옮긴 후 상주사방사업소에 파견근무하던 중 사표를 내게 됐다.
도청 근무 당시 오씨 부인과 헤어지고 함양 박씨와 재혼했다.
관리생활은 성실한 근무자세로 인해 전보와 승진에서 우대받았다.
비교적 높은 봉급으로 순탄한 생활을 하게 됐고 많은 경험도 쌓았다.
상주에서 근무하던 중 그가 관직을 그만둘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일제의 만주침략과 함께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농촌에 가혹한 곡물수탈을 한 때문이다.
그 과정에 본가의 부모님이 식량기근을 겪게 된 것. 어떻게 하든 부모님을 곁에서 부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게 된 것이다.
그때 상주에서 사방사업을 하면서 농촌지역의 부녀자들의 무지가 지역과 사회발전에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깨닫고 기회가 닿는 대로 여성교육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육영사업에 대한 관심을 가진 계기였다고 한다.


◆봉명그룹의 모태가 된 광산 사업을 시작하다
1945년 봉명광업소 임직원들과 함께. 앞줄 중앙이 이동녕.
1945년 봉명광업소 임직원들과 함께. 앞줄 중앙이 이동녕.
1940년 4월 사직원을 낸 지 두 달 후 문경무연탄광업소 소장인 일본인으로부터 경리주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자신 일생의 기업인으로 탄광사업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는 일제가 만주침략으로 지하자원 개발에 혈안이 돼 있었고 문경은 탄광지대로 점촌의 문경탄광과 가은의 무연탄광을 일본광업주식회사(약칭 문경탄광)가 본격 개발하면서 크게 부각됐다.
그는 문경탄광의 경영체제 변경에 따라 경영 책임을 졌던 일본인 북강 보(北岡 甫) 소장이 물러나면서 함께 사직하고 북강 소장이 새로 개발하기 시작한 마성면 소재 봉명광산에서 일하게 됐다.
1942년 개발에 착수한 봉명광업소는 서봉이 북강의 동업자로서 이 사업에 참여했지만 총무부장직을 맡아 회사일의 전반을 실무적으로 관장하게 됐다.
봉명광업소의 시굴작업이 마무리되기 전인 1945년 8월15일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았지만 일본인 경영자가 본국으로 떠난 상황에서 그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출하하지 못하고 쌓아둔 무연탄과 탄광 노동자들의 밀린 임금문제가 그를 난감하게 했던 것이다.
탄광업으로 전직한지 5년 만에 닥친 시련이었다.
자신은 경영주가 아니었지만, 그동안 저축해둔 돈과 집안 소유의 농지를 팔고 지인들로부터 빚을 얻어 노임을 청산하고 해방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며 장래를 설계하게 됐다.

그는 봉명광산이 시굴단계에서 중단됐지만 흑연의 품질이 우수하고 매장량이 엄청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자금을 모으고 광산관리권을 얻기 위해 진력했다.
천신만고 끝에 1947년 10월 귀속광구 봉명광산의 관리인으로 등록하고 광주가 됐다.
그러나 채굴된 흑연은 팔리지 않고 재고만 늘어나 엄청난 자금난을 겪고 있을 때 정부의 외화획득을 위한 수출정책에 따라 흑연과 중석을 무한 매입하는 데 힘 입어 경영난을 벗어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존재조차 없는 무역 열등국이었는데 정부 주선으로 흑연이 수출되자 서봉은 1950년 서울에 무역회사인 동창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무역업에도 뛰어들었다.

동창실업은 일본과 영국으로 흑연을 수출해 무역업체로는 경영이 순조로웠고 수출수요로 인해 흑연채굴 물량도 크게 늘어났으나 6ㆍ25전쟁이 터져 또다시 문을 닫는 시련에 봉착했다.
마침 대구사무소에 출장 왔던 그는 6ㆍ25 당일 상경해 동창실업의 업무를 챙기려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외상대금도 받지못한 채 한 달간 서울에서 피신했다가 간신히 문경을 거쳐 대구로 오게 됐다.
그 후 서울이 두 번째 탈환되고도 문경지역은 패잔병소탕을 끝낸 1953년에야 다시 광산을 가동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전쟁 전에 부산으로 내려보낸 흑연을 수출한 대금으로 사업을 재개할 여유를 가졌고 동창실업도 정부방침의 변경으로 직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데다 일본의 한국전호황으로 수출사업도 급성장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동창실업은 수출 외에도 건축업과 자동차수리업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기업가에서 육영사업·정치가로
이동녕은 4대 민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6,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br>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공화당 당무위원 임명장을 받는 모습.
이동녕은 4대 민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6,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공화당 당무위원 임명장을 받는 모습.
1981년 문창고 개교 10주년 기념 및 서봉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한 이동녕.
1981년 문창고 개교 10주년 기념 및 서봉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한 이동녕.

198 2년 부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가족과 함께 한 이동녕 부부.
198 2년 부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가족과 함께 한 이동녕 부부.
이 같은 호황에 힘입어 1953년 그가 동창실업의 사장에 취임하면서 봉명광업은 흑연 채굴량 월 2천t을 반은 내수용으로 반은 수출할 만큼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1956년에는 동창실업이 수출실적 20만 달러 이상의 실적을 가진 19개 업체에 랭킹 됨으로써 재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무역업체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창행사에서 수상했고 무역협회의 이사로 피선됐다.
이같이 사업이 순조롭게 번창해가자 그는 젊었을 때의 꿈인 육영사업에 관심을 갖고 1955년 사단법인 문경여자학원을 설립, 문경여중과 문경여고를 차례로 개교함으로써 자신이 이룩한 재산과 부를 고향주민을 위해 돌려주기 시작했다.
이 무렵 대전에서 대흥양조주식회사와 부국연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민간연구기관으로 국내 최초인 광일생산기술연구소를 창설했고 삼신해운주식회사와 한국규조토공업주식회사도 설립했다.
특히 봉명광업은 종업원 복지를 위해 단일사업장으로는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것이 당시 업계의 귀감이 됐다.
사업에만 전념하던 서봉은 문경지역의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 윤만석이 탈당함으로써 뜻밖에 이정림씨의 추천으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이 지역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정치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던 차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국회의원직을 사임했지만 5ㆍ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권유로 6, 7대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재개하게 된다.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 졸업후 첫 발령지가 문경보통학교였고 서봉이 그 학교의 학부모로서 오랜 인연을 맺었던 터라 거절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8대 총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출마를 종용했으나 그는 무투표 당선됐던 지역구를 기어코 후진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정부의 축산장려책에 따라 경주 보문지구에 삼주개발을 설립하고 목축과 유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게 됐고 이와 함께 관광레저를 겸한 주식회사 도투락을 설립했다.
서울역 앞에는 20층 규모로 삼주개발의 오피스 건물을 지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건물이었다.
광산과 함께 봉명의 2대 사업인 ‘충북시멘트’를 인수해 확장시키면서 아세아시멘트로 사명을 바꿨다.
이 같이 서봉은 나라의 경제성장에 맞춰 사업확장을 하는 한편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1968년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합쳐 영남대학을 건립해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9년에는 성균관대학을 인수해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고향 문경에서는 문경여중고뿐만 아니라 인문계고인 문창고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았다.

88세에 작고한 서봉은 슬하에 4남2녀를 두었고 아들들에게 사업체를 나눠 경영하게 했다.
묘소는 점촌 문창고교 뒷산에 있다.
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연보

1905년 문경군 문경읍 팔영리에서 출생
1914년 문경공립보통학교입학
1922년 문경군청근무
1935년 경북도청 회계과로 전근
1940년 경북도산림과 지방주사 사임
1942년 봉명흑연광업소 총무부장
1947년 봉명흑연광업소 관리인
1950년 동창실업주식회사 설립
1955년 재단법인 문경여자학원 설립
1957년 봉명광업소 불하 매입
1958년 제4대 민의원 당선(문경)
1960년 민의원 사임, 동창연료주식회사 설립
1963년 제6대 국회의원당선(문경), 광일생산기술연구소 설립
1967년 제7대국회의원 당선(문경), 삼주개발주식회사 설립
1968년 학교법인 영남학원 초대이사장 취임, 충북시멘트 인수
1969년 삼주빌딩 기공(1970년 완공), 문창종합고등학교 설립인가
1972년 정계은퇴
1974년 주식회사 도투락 설립
1976년 대영전기, 대영주공 인수
1979년 성균관대학재단 이사장 취임
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83년 대한판지주식회사 인수
1992년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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